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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곡면 지명유래
월봉마을(月峰) | 석곡1리 마을터가 하천변이어서 돌이 많다. 그래서 돌실(석곡)이라 했다. 마을 동쪽 달봉산 이름을 따서 1914년 월봉이라 했다. 문화재자료 제28호인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6.25전란중 희생된 면민들을 추모하기 위한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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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지마을(興旨) | 석곡2리 마을 남쪽에 옛 역원이 설치된곳이라 원촌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914년 옛부터 마을의 부흥을 휘한다는 뜻의 흥지마을로 다시 바꾸었다. 석곡돼지불고기로 이름난 마을이다. 음력 7월 20일이면 스무날 장이라 해서 씨름판등이 벌어져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1970년대 이후 이러한 풍경은 사라졌다. |
능파마을(凌波) | 능파1리 마을 뒤 달봉 기슭에 보성강이 굽이쳐 흐른다. 평산 신씨 신대년이 정자를 세워 능파정이라 했다. 1914년 마을 이름을 능차라 했다. 신대년과 친분이 있는 충무공 이순신이 백의종군, 여수로 가던 도중 능파정을 찾아와 신씨 5형제와 나라 걱정을 하며 밤을 새웠다는 얘기가 전한다. 지금은 능파정 자리만 남아 있다. |
능암마을(凌岩) | 능파2리 마을앞을 가로질러 보성강이 흐른다. 강 암석이 많아 절경이어서 1914년 능암이라 했다. |
덕동마을(德洞) | 덕흥1리 마을 뒤에 덕망산이 솟아 있고 옆으로 기동골이 있다 해서 덕동이라 불렸다. 대흥이란 마을과 마을뒤 마당제에 있는 풍치리를 합해 1914년 덕동과 대흥의 한글자씩 따서 덕흥리로 부르게 되었다. |
대흥마을(大興) | 덕흥2리 대흥마을 1997년 덕흥2리로 다시 분리되었다. 마을 뒤 죽곡면경계에 2백여m의 석성터가 남아 있다. 예봉중턱에 산제를 지내는 바위가 있는데 안팔천이라 불린다. 안씨부인이 백일기도를 올려 아들을 얻었는데, 서울로 가서 팔천량을 벌어와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
당지마을(當旨) | 당월1리 이 마을은 당머리라 불렸다. 산마을은 (산의 옛말중의 하나)+마을>닫말>닥말>당말>망멀>망멀이>당머리로 변화화했다.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당지라 했다. 1914년 당지와 월계의 한 글자씩 따서 당월리라 했다. |
월계마을(月桂) | 당월2리 마을 뒤에 달봉이 있고 마을 형국이 달에 밖인 계수같다 해서 월계라 했다고 한다. 예로부터 장수마을로 알려져 왔다. |
마산마을(馬山) | 당월3리 1979년 취락구조 개선사업 때 당지마을 12가구와 다른 마을 3가구가 새터를 잡아 마을을 이뤘다. 산사이의 골=뫼+사이+골>뫼사이골>뫼새골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마산으로 된 것이 아닌가한다. |
용주마을(龍珠) | 방송1리 마을 주변에서 무쇠가 나와 무수골이라 불렀다. 이 마을 지형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국이라해서 1914년 용주라 했다. |
방주마을(芳州) | 방송2리 조선개국공신이자 정란공신인 마천목장군이 통명산 기슭인 석곡면 당상전을 중심으로 사방십리를 하사받아 후손들이 번창한 마을이다. 마을 가까이 큰 방죽이 마을 이름을 방죽물, 방죽굴 또는 방연몰이라 부르다1914년 방주로 개칭했다. 마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정공영각, 마천목장군 신도비, 마장군묘소가 있다. |
상송마을(上松) | 방송3리 소나무가 많은 곳인 솔정이 송정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송정리라 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송정리라 불렸다. 이 마을은 웃돔, 아랫돔으로 갈라져있었다. 1914년 웃돔인 송정리를 상송이라 했다. |
하송마을(下松) | 방송4리 아랫돔, 즉 아랫송정리여서 하송이라 한 것이다. 고창에 살던 송흥경이 양반을 거만하다며 말에 매달아 이끌어 죽게 하여 후환이 두렵자 이곳으로 피신 정착했다고 한다. 마을 서북쪽 통명산에 은흥사의 절터가 남아있다. 어떤 사람이 선친묘를 쓰려고 절에 불을 질렀다는 얘기가 전한다. |
여운마을(如雲) | 연반1리 양천 허씨 허식이 정유재란 때 순천에서 국사봉 아래 절터가 있는 이곳으로 피난해왔다. 국사봉 중턱에 암자가 있었는데 지형이 높아 구름이 끼여 있을 때가 많아 여운암이라 불렀다. 이 마을이 해발 4백고지를 넘어 6.25전란 중 마을전체가 소개되이 폐허가 되다시피했다. |
용반마을(龍盤) | 연반2리 금산 김씨가 마을터를 잡았다. 약 200년 전 제주 양씨 양제가라는 사람이 담양 수북에서 살다가 고을 수령과 불화로 가산을 없애고 연동마을로 들어와 서당 훈도를 하면서 이곳에 마을을 이뤘다. 마을 뒤 운룡 반용이라는 명당이 있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1914년 용반이라 칭했다. 마을 뒷산에 있는 넓고 큰 바위를 매산바위라 한다. 국상이 나면 가처에서 유림들이 모여 북쪽을 향하여 곡을 했다고 한다. |
연동마을(蓮洞) | 연반3리 마을앞에 장터가 있어 장골이라 불렸다. 연하도수혈의 명당이라 연하동이라 했다한다. 1914년 연동과 용반의 한 글자씩 따서 연반리라했다 |
전기마을(田基) | 연반4리 마을형국이 봉혈이라 비봉으로 불리었다. 봉혈이면 알이 있어야 좋다고 해서 마을앞에 알모양의 둥근 흙무덤을 쌓아 봉란이라 했다. 1914년 전기리라 했다. |
죽산마을(竹山) | 죽산리 마을을 세운 최홍민이 자기 시조의 아호에서 죽자를 따고, 전주최씨여서 전주를 완산이라하므로 산자를 따서 1840년 죽산이라 이름했다한다. 설촌자인 최홍민을 기러기 위한 공덕비와 설촌1백년기념비. 석불입상이 있다. |
온수마을(溫水) | 온수1,2리 마을 쪽에 있는 나주 웃터우골에 나주 임씨가 살았고, 그 뒤 김해 김씨가 들어와 마을을 이뤘다. 마을 뒤 옥류동이란 곳에서 온천수가 나왔다고 해서 온수리라 불러왔다. 옥류동에는 절터가 남아 있다. 쇠가나왔다는 철철바위도 있다. |
노치마을(老峙) | 염곡1리 마을 뒤에 있는 높은 재를 노치라고 한다. 곡성과 화순을 오가는 길이며 한번 넘으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 늙는다는 데서 연유했다. 옛날 바다가 이산중에까지 미쳤을 때 이 근방에서 가장 높은 국사봉 정상에 배를 맨 말뚝이있어 뱃말뚝이라 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침입으로 마을이 모두 불탔다고 한다. 이 부락을 후세 18세기 중반 노기봉이라는 사람이 복구하는데 공을 세웠다고 한다. 6.25전란 때는 소금장수가 재를 넘는데 보름이 걸렸다는 보름재 고지에서 접전을 벌였다고 한다. 이 고지를 총사고지라고도 부른다. 마을앞길에는 범이 자주 나타났다는 범바위가 있다. |
을곡마을(乙谷) | 염곡2리 산골로 새 소리가 요란하다 하여 새을자를 써 을곡이라 했다. 마을 서남쪽에 있었던 절로 옥류동암자 등 소속 암자가 많았으나 빈대가 많아 폐사돼 빈대절이라는 얘기가 전한다. 염곡리 598번지에 우물터와 기왓장 주춧돌 등 이절터가 남아 있다. |
염촌마을(念村) | 염곡3리 마을뒤에 속칭 빈대절이 있었는데 이 절에 속하는 염불암이 마을 가까이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암자 이름 그대로 마을 이름으로 부르다가 1914년 염촌으로 개칭했다. 효성이 지극한 안사백이 아버지병환에 허벅지살로 치유하고 겨울에 죽순을 봉양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도장골에 빈대절에 속한 암자터가 남아있다. 1914년 염촌과 을곡의 한 글자씩 따서 염곡리라 했다. |
기동마을(基洞) | 염곡4리 텃골이라 불리다가 1914년 기동으로 표기했다. 승려가 바위에 앉아 점심을 먹다가 숫가락을 떨어뜨려 주우려다가 잘못하여 바위틈에 끼여죽고 말았다는 중바위 얘기가 전한다. |
행정마을(杏亭) | 유정1리 마을앞에 있던 우물가에 큰 살구나무가 있어 행정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역촌이었다고 한다. |
유평마을(柳坪) | 유정2리 조선 인조 병자호란 때 거병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김감이 갓머리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러나 1857년 대홍수로 마을이 유실돼 버듬들로 마을을 옮겼다. 유평마을은 쭉 뻗은 들이 있는 마을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뻗어있는 들=벋은+들>벋은들>버든들>벋들로 변화했다. 한자로 옮길 때‘벋’을 버드나무로 보고, 버들 유와 들 평자를 쓴 것이다. 버듬들이 유평이 됐다. 1914년 유평리 와 행정리에서 한 글자씩 따서 유정리라 하고 구를 나눴다. 설촌기념비와 마을 중건하는데 공이 큰 사람들을 기린 사호당비, 보성강병의 절벽 위에 김감이 세운 반구정이 있었다. 지금은 육모정이 있다. |
홍척마을(紅尺) | 구봉1리 마을터 주변이 황토로 둘러 쌓여 있고 지형이 자처럼 길게 늘어진 곳이라 홍척이라 했다. 일제 때 쇠가 나왔다는 쇠봉몰랑이 마을 뒷산에 있다. |
등구마을(登九) | 구봉2리 지형이 거북이가 구산을 보고 기어올라가는 형국이라 하여 등구정이라 했다. 빈대절이 폐사가 되자 주지스님이 재를 넘어가다 상자승을 잃고 바랑골에서 바랑까지 잃어버려 발을 뻗어놓고 울었다는 '설음버든' 얘기가 전한다. |
봉림마을(鳳林) | 구봉3리 뒤로는 한동산의 주봉이 있고 오른편에 구산이 뻗어 그 형국이 봉황이 날개를 펴고 있는 것과 같다하여 봉림이라 칭했다. 한말 의병들의 싸움터로 전하는 굴이 있다. 1914년 등구와 봉림의 한글자씩 따서 구봉이라 했다. |
두지마을(斗旨) | 봉전1리 마을형국이 마치 뒤주 같다해서 붙여졌다. 뒤주>두주>두지로 변화했다. 두지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마을 옆 두지봉이라는 산이 있고 마을 뒤에 쥐등이라는 산등성이가 있다. 쥐가 두지를 침범하면 마을에 재앙이 온다고 해 마을 앞에 고양이 바위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
봉암마을(鳳岩) | 봉전2리 마을 뒷산에 벌통바위가 있어 봉암이라 부르다 1914년 봉전2구가 됐다. 바위에 불빛이 비치면 마을이 해롭다는 벌바위 주변에 나무를 심어 가리워 왔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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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19-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