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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동면 지명유래18절유래보기
본 면은 사찰이 18개 있다하여 목사동면으로 칭하였다 함.
평리1구(坪湖마을) | 당조선 인종 때 쌍암에서 살던 여창태가 불당골에 암자를 짓고 살기 시작했다. 들을 형성한 곳에 마을이 있어 들멀이/돌말이/평호리라 했다. 현재 목사동면 행정기관을 비롯 공공기관이 위치하고 있어 면민 생활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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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리2구(高頭마을) | 들멀이 홍수로 해마다 수해을 당하자 마을 뒤 높은 곳에다 마을을 조성하여 고머리(高頭)라 불렀다. 지형이 활(弓)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고의머리 형에서 비롯됐다고도 한다. 동산사(東山寺)가 폐사 당시 마을 뒷산 너들겅속에 부처를 파묻어 마을 뒷산을 너들겅이라 전한다. |
평리3구(弓頭마을) | 해주오씨 오치의가 유배되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마을 뒷산이 활(弓)모양 같고 앞산이 화살머리 같다 하여 활머리(弓頭)라 칭했다.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이 용마을 타고 무예를 연마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
동암리(東岩마을) | 밀양손씨 손홍록이 동산사에 불공을 드리러 왔다가 3백여 년은 편히 살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윗 마을은 불당골(東山寺谷) 아랫마을은 관암촌(황새가 앉아 노는 바위가 있다 하여 觀岩村) 이라 했다. 동자(東)와 암자(岩)를 합쳐 동암(東岩)이라 부른다. 동산사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아미산에 있던 사찰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
구룡리(九龍마을) | 마을 뒷산 비래산에서부터 마을 앞까지 큰바위가 9개가 있고 마을 뒷산 능선이 용(龍)의 형극을 이루고 있는 것이 9개가 있다고 하여 구룡리라 부른다. 신숭겸 장군의 탄생지다. 지방기념물 98호인 용산재가 있다. 신장군에 매년 음력 9월 17일 제사를 올리는 단소(壇所)가 있다. |
사당리(司堂마을) | 고을에서 으뜸가는 서당(藥英齊)이 있어 서당(書堂)골이라 하다가 1902년 사당(司堂)으로 1914년 사당리와 용암리를 한 글자씩 따서 용사리로 개칭했다. |
용암리(龍岩마을) | 고려시대 신숭겸 장군의 후손들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신장군이 보성강변 용바위에서 무술을 연마했다고 하여 용암(龍岩)이라 칭했다. 마을 앞 냇물에다 다리를 놓아 다리목이라 하다가 1914년 용암과 용사를 합하여 용사리라 했다. 신장군이 무술을 마치고 목욕을 했다는 용탄(龍灘)이 있다. 용탄에서는 기우제도 지내왔다. 마을의 모양이 배처럼 생겼다 하여 우물을 파면 망한다는 구전에 따라 냇가물을 이용했다. 1971년 이후에야 가구마다 샘을 파 이용하고 있다. |
고죽리(古竹마을) | 옛날부터 대밭(竹林)이 무성했다. 그 대밭에 집을 지어 살면 부자가 난다고 했으나 부자는 나지 않고 과부만 자주 생겨 폐촌하고 대밭 아래인 지금의 마을로 이주했다. 마을 이름은 고죽(고대실)이라 칭하고 있다. |
도장리(道藏마을) | 산골짜기 안쪽에 있다는 마을로 산 안골로 부르다가 점점 변하여 도장골로 변화했다. 한자로 옮겨쓸 때 도장으로 표기한 것이다. 1914년 수곡리로 개칭했다. |
범계1구(川坪마을) | 옛날 나루가 있었다. 하천변에 있는 샘물이 좋아 외지 사람들이 많이 찾아 왔다고 한다. 마을 앞에 하천이 있고 들이 있어 천평이라 칭하다가 1914년 범계리가 되었다. 고려시대 남산사가 있었다고 한다. |
범계2구(虎谷마을) | 마을 뒷산의 산세가 호세형(虎形)이어서 범실이라 했다. 이마을에서 죽곡면 당동을 잇는 나루터인 본토진(本土津)이 있었다. |
공북1구(龜龍마을) | 마을 앞 연못에서 거북이가 용이 되어 등천했고 거북처럼 생겼다 하여 구룡이라 하다가 1914년 공북리로 바뀌었다. 북쪽이 훤히 트였다고 해서 공북(拱北)리라 붙여졌다. 공북, 범계, 대곡리의 교통요지인 공북나루터가 있어 배가 다녔으나 1971년 목사동 제2교가 세워지자 나루터가 폐지되었다. 1971년 가설된 교량이 노후되어 1999년 새로 교량을 가설 현재 차량이 통행 사용하고 있다. |
공북2구(孝垈마을) | 의성 김씨와 원주 원(元)씨가 마을에 정착 효자가 대를 이어 나왔다 하여 효대라 칭했다. |
소방리(小防마을) | 마을 옆 보성강의 협소한 곳을 막아 전답에 물을 대었으나 너무 적어 조메기(小防)라 부르다가 1914년 대곡리로 바꾸었다. 마을 앞 보성강에 대곡 나루터가 있었다. 대곡리에서 석곡방면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그 곳을 뱃섬길이라 불렀다. |
대신리(大新마을) | 지금의 대곡3, 4구에서 살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 새로 터를 크게 잡았다 하여 새터(大新)라 했다. |
당산리(堂山마을) | 전주이씨 이기돈이 임진왜란 피난길에 남으로 내려와 정착했다고 한다. 마을입구에 심은 느티나무가 (당산나무)가 있다. |
덕산리(德山마을) | 전주이씨 이홍경이 남원에서 임진왜란 때 피난하여 당시 석곡면 유정리에 살다가 이곳으로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아미산 산세가 준엄하여 귀인과 부자가 많이 날 것이라며 덕산이라 했다고 한다. 마을 뒷산에 덕산사 터가 있다. |
신기리(新基마을) | 마을이 보성강변에 있어 심포(深浦)라 했으나 홍수만 나면 마을로 물이 범람하므로 지금의 마을로 옮겨와 신기리라 했다. 고려시대 보조국사가 창건했다는 천태암이 1957년 1월 13일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현재 복원공사를 추진하고 있다. 온 마을이 산으로 뒤덮였으나 1978년 호남고속도로가 마을 앞을 통과하게 된 후 산골마을에서 벗어났다. |
신전1구(高濟 마을) | 마을 앞 냇물이 있어 높은 터에 집을 지었다 하여 고제굴이라 하였다가 1914년 신전리로 바뀌었다. |
신전2구(薪田마을) | 마을 앞에 섶이 많아 섶 밭몰로 불럿다. 마을=섶+인+몰>섶안몰>섶밭몰로 변화했다. 한자로 섶나무신(薪)자와 밭전(田)자를 쓴다. 현재는 마을 앞 뒤로 배 과수원이 다량 조성되어 1999년부터 배 수출 (미국.캐나다)단지로 조성되어 있다. |
죽정1구(元停마을) | 정자가 있어 원정이라 했다고 한다. |
죽정2구(竹林마을) | 마을형성 약 350년 전 전주인 최치환(崔治煥)이 전주(全州)에서 입향했으며 밀양인(密陽人) 박치유(朴致有)는 청주(淸州)에서 살다가 생계가 곤란하여 형제들이 살 길을 찾아 헤매다가 이 마을에 와보니 산세가 수려하고 수원이 좋아 살 만한 곳이라 하여 거주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마을유래 마을 위에 대밭을 만들어 왕성(旺盛)하자 죽림부락(竹林部落)이라 칭하다가 1914년에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죽정(竹亭) 2구로 개칭(改稱)하게 되었다. |
죽정3구(猶峙마을) | 성주배씨 배성남씨가 임진왜란 당시 계곡이 깊은 이 마을에 피난 정착했다. 마을 뒷산이 닭혈이라 닭재(猶峙)몰이라 했다. 1914년 원정, 월평, 죽림, 송전 등을 폐합 원정과 죽림의 한글자씩 따서 죽정리라 했다. 희아산 정상에 큰 배바위, 작은 배바위가 있는데 옛날 배를 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
용봉구(坪地마을) | 행주기씨 기상모가 나주에서 살다가 지금의 마을에 터를 잡고 읍터를 전답으로 만들어 마을을 새로 이뤘다고 한다. |
용봉2구(龍田마을) | 성주이씨가 평지마을(용봉1구)에서 살다가 수원이 좋아 입향하였으며 그 후 경주정씨가 설촌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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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수정일 2019-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