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옥과면 지명유래
옥과 | 구 옥과현 당시 읍소재지마을 이었으며 하동.하당리.갈산리.옥전리 등이 합하여 1914년에 옥과리라 개칭하였다고 함. |
---|---|
옥전 | 구 옥과현 당시 읍소재지마을 이었으며 하동.하당리.갈산리. 등이 합하여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옥과2리로 분리 되었음. 고려말에 옥(獄)이 있어 옥앞의 마을이라 옥전(獄前)이라 하다가 후에 옥전(玉田)으로 변경 옥전리(玉田里)라 칭하였음. |
죽림 | 마을회관 부근으로 금갱이 있어 지어졌다는 대금(大金)리와 마을 뒤 양지 바른 곳에 대나무가 무성해 붙여졌다는 죽림리(일명:양지편)를 1914년 합하여 죽림리라 했음. |
지동 | 마을 형성 당시 지세(地勢)로 보아 도(道는)와 덕(德)이 출충될 형(型)이라 도덕촌(道德村)으로 불러 오다가 임진왜란 당시 설산지하(雪山之下)10리내 동(洞)자가 들어 있는 마을이 피난지라 하여 이 마을을 지동(智洞)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
리문 | 현 리문리는 옥과면이 현감 재직시 화순. 담양. 순창 등 3개현감의 래왕(來往)이 자자하여 관문(官門)이라는 뜻에서 리문리라는 지명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음. 소재지 일부. 사장터. 무림동 등 3개마을로 구성되었으며 옥과5일시장(매 4. 9일) 이 소재하고 있음. 사장터는 활 쏘는 장소 즉 과녘을 설치하였던 곳에서 명명되었고 무림동(茂林洞)은 당시 느티나무숲이 우거져 있기 때문에 무림동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함. |
용두 | 마을뒤 산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가다가 끊기면서 선호천(仙胡川)이 흐르고 있어 용이 꿈틀거리며 물로 들어간 형상이라 하여 용두촌(龍頭村)이라 하였음. 호남고속도로변 주변 마을이나 고가(古家)와 초가(草家)가 많았으므로 1977-1978(2년간) 취락구조개선사업을 실시하여 근대화 된 마을 임. |
무림동 | 무림동(茂林洞)은 당시 느티나무숲이 우거져 있기 때문에 무림동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함. |
설옥 | 마을뒤 북쪽 바위산의 모습이 멀리서 보면 눈(雪)처럼 하얗게 보이므로 그 산을 설산이라 불렀고 설산아래 위치 했기에 설산리라 칭하다가 1914년 옥과에 속하면서 설옥이라 개칭하였으며 창평현(昌平縣)에 속하였을 시에는 나무가 많은 山中마을이라 하여 목동(木洞)이라 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음. |
지방 | 괘일산 남방 계곡의 협소한 골짜기에 마을이 조성되여 지방이라고 명명하였고 개울 건너마을은 덕인(德人)이 배출될 곳이라 하여 덕곡리(德谷里)라 친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설옥2구로 개칭되었음. |
율사 | 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 형태가 밤알맹이(栗)와 같이 생겼고 마을 뒤에 밤나무가 무성하여 밤정굴이라 하였으며 절이 있어 율사리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옥과향교가 황산리에서 명당이라고 알려진 이 곳으로 이전했다가 다시 옥과리로 이전했다. |
금단 | 앞에는 황산(凰山)이 있고 뒤에는 설산(雪山)이 있어 양산의 정기를 받고 앞냇물은 황금(黃金)이 있어 요산요수(樂山樂水)라 하여 터를 잡았으며, 큰 비만 오면 냇물이 범람하여 가옥과 전답이 침수되어 수침동(水浸洞)으로 명명되어 화면(火面)에 소속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옥과면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름. |
황산 | 마을 뒤산이 봉황새형(形)이라 하여 황산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1982년2월15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겸면에 속해 있다가 옥과면으로 편입. 마을 뒷산이 봉황새 형이므로 뒷산의 모든 묘(墓)에는 석물(石物)을 할 수 없다 하여 석물이 된 묘는 볼 수 없음. |
보정 | 두루미와 황새가 샘(井)을 발견하였고 그 샘의 물이 맛과 빛이 아주 좋아 보정(寶井)리라 하였으며 1982년2월15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겸면에 속해 있다가 옥과면으로 편입. |
무창 | 조선조때 경양도(景陽道) 찰방(察訪에 딸린 대부역(大富驛)이 있어 무기와 병사를 많이 주둔(駐屯)시켰으며 지형이 궁(弓)형이라 궁(弓)은 즉 무(武)를 상징한다 하여 무(武)를 장려 창성(昌盛)시킨다는 뜻에서 무창리(武昌里)라 하였다 함. 무창리는 武字가 앞에 있어 항상 쇠소리가 나야 흥한다 하여 방자점(주물공장)을 많이 두어 농악의 악기(징.꽹가리)를 많이 생산하였다고 함. |
신흥 | 무창마을 인근에 새로 마을터를 잡으면서 새로 일어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신흥(新興)이라 불렀다한다. |
금의 | 300여년전 이 마을에 애당(艾堂)이라 호(號)를 부르는 사람이 과거 급제하여 금의환향(錦衣還鄕)하게 됨으로 금의동(錦衣洞)이라 하였으며 이분의 호(號)인 애당(艾堂)을 따서 쑥당이라고도 함. |
주산 | 동남북 방향은 평야지이며 서편에는 남북으로 뻗어있는 산이 있으며, 마을 앞에는 큰 냇물이 흘러 풍수지리적으로 배(舟) 형국(形局)이라 하여 주산리라 하였다 함. 마을 서편(西便)에 있는 안산(案山)중턱에 약수터가 있는데 피부병에 좋으며 성하기(盛夏期)에도 손을 넣지 못할 만큼 차가운 물이 나는 샘이 있음. |
배감 | 임진애란때 한 장사(將師)가 이곳에 와 보니 마을 부녀자들이 임진왜란이 터진 것도 모르고 베를 짜고 있었고 특히 감나무가 많아서 培甘이라 부르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음 |
수리 | 옥과현 수면(水面)의 지역으로 물이 많으므로 물한실 또는 수대곡(水帶谷)이라 하였으며 1908년 창평군 수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수리라 칭하여 옥과면에 편입 됨. 도로에서 보면 마을이 금자형(金字形)이므로 타성(他姓)은 오래 살지 못하고 김씨(金氏)만 살게되어 경주김씨 터라 부름. |
신수 | 마을 뒷산 지형이 사봉(砂峰)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당시 새터라 칭하다가 일제시대 초대 수면(水面) 면장인 김재순씨가 마을 앞에 많은 물이 흐르는 새로운 마을이라 하여 신수리(新水里)라 칭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고 일명 조리터라고도 칭하고 있다. |
소룡 | 태고적 이 지역이 바다였을 때 용이 살던 곳이라는 설에 의해 용의 집(巢)이라 하였으며 지형이 용처럼 머무는 곳이라 하여 소룡리라 칭하게 되었음. |
합강 | 마을뒤로 섬진강이 흐르고 앞으로는 옥과천이 흘러 강이 합친다고 해서 합강(合江)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사방이 산으로 쌓여 있기 때문에 도리산(道裡山)이라고도 하고 있음. |
광암 | 마을 주변 산 전역에 바위와 돌이 많아서 마을 형성 당시부터 광암으로 불리어져 현재에 이름. |
콘텐츠관리
- 담당부서 재무과
- 담당자 김길순
- 연락처 061-360-2812
- 최종수정일 2019-08-22